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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죽 최경창과 기생 홍랑(洪娘)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

행복 뚜엣 2011. 11. 11. 21:57

어저꺠 강무리님의 퇴계 이황과 두향의 러브 스토리를 들려 주셨는데........

그곳에 답글로 두향의 마지막 부분을 달아 놓고는.......

 

조산 오백년 동안 그에 못지 않은 러브 스토리가 있었으니....
고죽 최경창과 홍랑의 러브스토리를 오늘 들려 드립니다

 

고죽 최경창과 기생 홍랑(洪娘)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

최경창(1539-1583)은 한글창제를 반대한 보수학자
 최만리를 배출한 문벌가문인 해주 최씨이다.

전남 영암에서 태어난 그는 이이·최익필 등과 어울려
8대가라고 불리기도 했고,

당시(唐詩)에도 뛰어나 백광훈·이달과 함께
3당 시인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신윤복/ 월하정인(月下情人)

홍랑(洪娘)과 최경창(崔慶昌)의 러브스토리......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최경창의 나이는 34세,
홍랑의 나이는 알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435년 전,
함경도 경성
(鏡城) 관기 홍랑과 그 지방으로 부임한
북도평사(北道評事) 최경창의 만남이 있었다.

당시에 위험한 변방에 부임하는 관리는
 가족을 동반할 수 없는 국법으로 인하여
최경창은 처자를 서울에 둔 채 홀로 그곳에 부임하였다.

함경도 홍원 출신인 홍랑은 기생으로 비록 신분은 비천했으나
교방(敎坊)에서 각종 악기와
가무를 단련하면서도
문장과 서화 등의
기예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문학적 소양과 재주는 이미 양반 사대부나
유명한 시인 가객들에 뒤지지 않았으며
,

일부종사를 맹목으로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기생이었지만

자신의 정절을 받쳐 사랑할 운명적 만남을 꿈꾸며
몸을 함부로 놀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 소양과 식견을 이미 갖춘 홍랑은
새로 부임한 당대의
삼당시인(三唐詩人)
또는 팔문장(八文章)으로
명성이 높았던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을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죽 최경창은 탁월한 문장가인데다 음률을 잘 알고,
악기를 다루는 재주 또한 뛰어났던
인물이었으니 시화에 음악에 둘은 막힘이 없었다.


그는 도학자(道學者)의 모습보다는 풍류객 기질(風流客 氣質)을
 지녀 북도평사(北道評事) 시절 
군막(軍幕) 속에서도
세인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홍랑과 지냈다.

그러나 이듬 해 봄,
최경창의 임기가 끝나서 서울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이별을 해야만 하게 되었다.

눈물로 밤을 지새운 홍랑은 최경창을 배웅하며 따라 나서서
 몇 일만에 도달한 함관령
(咸關嶺)고개.....

노비 신분인 관기 홍랑은 그 경계 이상을 넘을 수 없었다.
메어지는 가슴을 달래려던 홍랑은 길옆에 피어나는
산 버들가지를 꺾어주며 시조 한수를 읊게 된다
.

묏버들 가려꺽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고죽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홍랑은 쌍성(雙城)까지 따라와서 작별(作別) 하였다.

최경창이 함관령(咸關嶺)에 이르자
날이 저물고 어두워졌는데 비까지 내렸다.


그리고 2년후

최경창은 서울로 돌아와 병을 얻어 앓아 눕게되고,
그런 소식을 들은 홍랑이
7일밤낮을 걸어 찾아와
병간호를 하게되어
최경창은 그녀를 첩으로
삼게되지만

당시 명종비 인순황후의 국상중이던 시절이라 조정대신들은
이를 구실로 두 사람 사이를 헐뜯은 탓에 최경창을 파직시켜버리고

먼 변방의 지역으로 발령을 내린후
홍랑은 다시 홍원의 관기로 돌아가게되는데...

최경창은 병이 낫자 홍랑을 보내면서 난초와 함께 눈물로 홍랑을 떠나보내며
최경창은 ‘송별’이란 제목으로 두 편의 한시(7언 절구)를 지어 주었다.

相看贈幽蘭·(상간맥맥증유란)
'맥맥(:정을 품고 바라보는 모양)히 마주보며 난초를 선물하고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이번에 멀리 떠나면 언제쯤 돌아오려는고
莫唱咸關舊時曲·(막창함관구시곡)
함관령에서 예전에 불렀던 노래는 부르지 말라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이제까지 구름 끼고 비 내려 푸른 산이 어둡네
('記聞叢話·기문총화').

둘 사이의 이별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두운 상황으로 비유하여
다시 못 만날 것을 예견한 것이다.
자기의 운명을 예감했던 탓일까.

종성부사로 부임한지 1년 후 고죽은 종성에서 한양으로
돌아오다가
이 이별을 마지막으로45세의 젊은 나이로 객사했다.

최경창의 죽음을 들은 홍랑은 다른 남자가 자신을 넘볼까
스스로 얼굴을 훼손하고
세수도 않고 머리도 빗지않으며
최경창의 무덤가에서 3년을 시묘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그것도, 최경창의 정부인과 가족들 몰래....
그 와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홍랑은 최경창이 남긴 시고(詩稿)를
챙겨들고 홍원으로 피난을 떠났다.


덕분에 그들의 시가 오늘날에도 전하게 되었고
그렇게 6년을 더 보낸후 그녀 또한 죽음으로써
그들의 사랑도 끝나는데.......


그후 그녀가 죽자 완고한 해주 최씨 가문에서
홍랑의 일부종사를 가상히 여겨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밑에 그녀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다율리의 해주 최씨 선산에 가면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밑에
기생 홍랑의 무덤이 있다고......

기생이라 천민이나 다름없지만
그녀의 지조지순한 마음과 최경창을 사랑한 마음을

해주 최씨 문중에서도 인정받아
해주최씨 사람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라고...

지금도 해주최씨 문중은 홍랑을
할머니라 부르고 제사도 같이 지낸다고 한다.

 

오늘은 우리 엔돌핀님들에게
러브스토리를 한편 들려드렸습니다.

 

제가 쓴  서라벌의 러브스토리 열편도 있는데...

들려 드려요?  말까요?

- 파주의  홍랑과 최경창의 묘-
 

 

출처 : 엔돌핀이 있는 마을
글쓴이 : 죽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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